字體:小 中 大 | |
|
|
2021/07/22 08:35:02瀏覽1214|回應1|推薦41 | |
影片下方的韓文說明
한국사전 – 아버지의 눈물, 영조
— 아들을 크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水賜]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수많은 정치적 위기를 겪은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균역법을 통해 공역 부담을 줄였다.
영조는 나이 마흔 넘어 얻은 조선 왕통의 유일한 후계자, 사도세자를 위해 세 살 때부터 조기교육을 시켰다. 영조는 세자교육관을 직접 선발하고, 구체적인 공부내용과 방법을 지시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문답하여 세자의 능력을 시험하곤 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
—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부자(父子) 사이에 틈이 생기다
영조는 즉위 때부터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755년 결정적으로 부자 갈등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대화의 단절,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가로막은 벽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가운데 직접 만나는 기회조차 줄어들게 된다. 아들이 부왕의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자 왕과 왕세자 사이의 멀어진 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연일 상소를 올렸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종(不從: 따르지 않겠다)" 이때부터 노론은 세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자의 관계가 멀어진 가운데 왕세자가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온갖 비행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게다가 이 모두가 아들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데...
—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1762년 5월 13일,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창경궁 앞뜰로 간 아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나무뒤주.
궁궐문을 봉쇄하고, 조정 대신들조차 출입하지 못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 당시 바로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설서, 권정침! ‘한국사 傳’에서는 임오화변의 목격자,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보았다. 그날, 창경궁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사전 6회 – 아버지의 눈물, 영조 (2007.7.21. 방송)
Naver PAPAGO 翻譯, 再加以修正
韓國史傳 – 父親的眼淚,英祖
— 想要將兒子培養長大的父母心,早期教育
出身水賜❶的母親❷,在黨爭中經歷無數政治危機的英祖,是克服天生自卑感,一生踐行"謹慎"兩個字的愛民君主。 設立「申聞鼓」,傾聽百姓的呼聲,通過「均役法」減輕了工役負擔。
英祖從三歲開始爲年過四十獲得的朝鮮王統的唯一繼承人思悼世子進行早期教育。 英祖親自選拔世子輔養官,並指示了具體的學習內容和方法。然後通過問答書的內容來考驗世子的能力。並且以自己的經驗爲基礎親自著述了《御製自省錄》、《御製常訓》等教材。
❶高麗、朝鮮時代,宮廷中負責打掃等打雜的小宮女。
...崔氏生於朝鮮顯宗十一年十一月六日,七歲時入宮當宮女。根據野史記載,崔氏曾是服侍仁顯王后閔氏宮中的水賜伊。...
—思悼世子的代理聽政,父子之間產生隔閡
英祖從即位開始,就揹負着被老論所選擇的"老論之國君"的政治負擔。 1749年,15歲的兒子代替父親坐上了王位。 爲了解決黨爭英祖的殺手鐗,代理聽政! 但是父親和兒子不僅性格差異,連政治立場也開始分裂。
在這種情況下,1755年發生了決定性的成爲父子矛盾的種子的事件... 從《承政院日記》中可以發現當時的內容被集中刪除。 當時發生了什麼事情呢?
— 斷絕對話,阻礙父親和兒子之間的隔閡
父親和兒子在政治上已經疏遠,直接見面的機會也會減少。 因爲兒子經常推遲向父王的問候。 絕對權力者王和王世子之間的隔閡。
中間有擠進來的勢力。 雖然老論爲了剷除少論的根源,連日來提出了上疏,但世子的回答始終如一。
從那時起,老論開始直接攻擊世子。 父子關係漸行漸遠的情況下,王世子放火焚燒樂善堂、殺害宮女等各種行凶的上疏接連不斷。 而且,還有人懷疑這一切都是兒子的精神病引起的...
—父親爲什麼要殺掉兒子?
"看來我今天要死了..." 1762年閏五月十三日,兒子預感到了自己的死亡。 接到父親的召喚,兒子來到昌慶宮前院[的徽寧殿],映入眼簾的是米櫃。
封鎖宮殿門,連朝廷大臣都無法出入的思悼世子死亡現場! 當時就在那裏,有人在現場目睹了父親把兒子關進米櫃的情景。 負責世子教育的世子侍講院說書,權正忱! 在《韓國史傳》中,通過壬午禍變的目擊者、權正忱的文集《平庵集》解開了圍繞思悼世子死亡的疑惑。 那天,昌慶宮裏發生了什麼事情呢?
韓國史傳第6集 – 父親的眼淚,英祖(2007.7.21.播放)
附錄
《平庵集》
圖1(另開新視窗可看到較清楚的圖文內容)
《平庵集》的介紹
圖2.圖3; 以"閏五月十三" 為關鍵字找到的內容. 另外也曾用 "壬午禍變", "壬午", "思悼世子" 為關鍵字查詢, 均無具體結果.
其中提到的林德躋,任珹...在李光鉉《壬午日記》也都有記載. 雖聽說有一本《任臹日記》, 但一直找不到.
兩篇文章其實都是權正忱的墓誌銘.
要看到書的內容, 先決條件是在網站註冊, 登入後就可閱讀.
|
|
( 休閒生活|藝文活動 ) |